낭만적인 고전미와 세련된 현대미가 공존하는 현재, 여성복은 우아한 ‘요조숙녀’로, 남성복은 기품 있는 ‘신사’로 표현된다.
복고풍와 빈티지 스타일의 영향덕에 오래 숙성된 와인과 같은 인상을 주는 보라색이 유행색의 중심에 섰다.
“그런데 왜 보라색이 유행이죠?” 가을 겨울 패션 경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같은 질문을 받는다.
‘우아한 복고풍의 빈티지 와인 색에서 영감을 받은 신비주의의 경향’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답은 간단했다.
“봄 여름에 비해 옷 색깔이 많이 어두워 졌거든요. 모래색이나 갈색, 짙은 녹색이 유행하는 데 한 가지쯤 튀는 색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가을색이면서도 따뜻한 색과도 잘 어울리는 보라색이 유행이죠”라고. - 따뜻한 색과 잘 어울리는 '천상의 색'보라색은 따뜻한 색인 빨강과 차가운 색인 파랑이 섞인 색이다.
이 두 색은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반대되는 색이다.
그래서 보라색은 이중적이다.
보라색 어느 색과도 잘 어울리지만 독립적인 정신 세계를 지니고 있다.
보라색은 숭고하고 당당하며 독보적인 성격을 지니지만 한편으로는 외롭고 슬픈 인상이 있고, 우울하고 불안한 분위기와 거만한 이미지가 있다.
또 감정을 숨기거나 속이는 두 얼굴을 품고 있다.
보라색은 실제로 정신병 환자들 중 조울증 환자들이 가장 많이 선택하는 색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고급스럽지만 한편으로 우울과 불길의 색인 보라색이 뜨는 이유가 스스로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보라색 직물은 고대부터 그 신비한 빛에 매료된 사람들로부터 ‘천상의 색’이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보라색(purple)의 어원을 살펴 보자. 라틴어 ‘푸르푸라(purpura)’, 그리스어 ‘포르피라(porphyra)’는 빛의 순수함을 뜻하고 있다.
빛은 바로 신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사전적 의미로 ‘born to the purple’은 ‘황제의 집에서 태어나다’는 뜻이고 ‘raised to the purple’은 ‘성직자나 수도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promotion to the purple’은 왕이나 추기경의 지위를 나타나는 의미로 고귀함과 높은 지위를 가리킬 때 널리 사용되어 왔다.
보라색의 고귀함은 그 염료의 희귀성에 있었다.
천연 재료로 얻을 수 있는 보라색 염료는 얻기 힘든 만큼 매우 고가였고 특권 계층의 전유물로 오랜 세월을 귀하신 몸으로 떠받들어 졌다.
보라색의 어원인 ‘푸르푸라(purpura)’는 그 빛깔의 염료가 비싸서 이것으로 물들인 비단은 특별히 귀한 대접을 받았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에서는 주피터 신을 묘사할 때 중심 색으로 보라색이 사용됐고, 신을 모시기 위해 올리는 제사에 제사장도 보라색 옷을 입었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등 고대의
많은 철학자들은 보라색을 가장 아름다운 색이라고 말한 데는 색이 지닌 희귀성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로마시대에는 고위 공직자의 의복에만 보라색이 허용됐고, 보라색과 금으로 된 옷은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만 입을 수 있었다.
황실 관계의 초상화나 석관에도 이 빛깔의 이집트산 석재가 쓰였다.
4세기 초 보라색은 황제만의 독점색이었다.
그 독점욕이 어느 정도였냐 하면, 보라색 옷을 입는 사람은 역모를 꾀하는 것으로 여겨져 처벌을 받을 정도였다.
천연 염료로 염색한 보라색은 그 빛깔이 오래도록 변치 않았다.
내구성이 강한 보라색 천들은 200년 정도 색을 유지했다.
그래서 로마의 황제들은 보라색으로 수의를 만들어 입었고, 중세 말기까지 귀한 사본에 쓰인 양피지도 보라색으로 염색됐다.
16세기 들어서도 보라색은 ‘로얄 퍼플(royal purple)’이라 불리며 대관식이나 장례식 등에서 사용되는 왕실의 색이었다.
왕의 대관식에서 보라색 옷을 입는 것은 물론이고 왕가의 장례식 이후 1년간 법으로 정해진 보라색 상복을 입어야 했다.
높은 신분에게만 한정됐던 보라색이 대중들에게 개방된 것은 과학의 발달 때문이다.
합성 염료가 발명된 빅토리아 시대에는 그 동안의 보상심리가 작용한 것처럼 보라색이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이후 보라색은 아르누보, 초현실주의 같은 신비주의의 문화 사조에서 중심 역할을 하며 독보적인 성질을 이어 왔다.
보라색에 대한 동경은 동양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중국의 ‘자극사상(紫極思想)’은 색상 중에 보라색이 제일이라는 말. 그래서 보라색에는 황제나 신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출세해서 고관이 되는 것을 ‘타자(拖紫)’라고 했고 보라색을 뜻하는 자(紫)색은 고관을 나타내는 색이었다.
보라색이 불운과 불길의 기운을 얻은 것은 종교 때문이었다.
구약시대에는 황금색과 함께 고귀한 색으로 치며 사제의 옷 등에 쓰였지만, 이것은 또 이교적 우상 숭배의 상징색이 되기도 했다.
기독교적 입장에서는 파랑과 빨강이 신의 힘과 자애로 해석되면서 인류 구원을 위해 수난하고 희생한 ‘그리스도’의 빛깔로 보라색이 지칭풉竪?했다.
다가올 심판을 적고 있는 요한계시록에는 인간을 괴롭히는 연기의 빛깔이 보라색으로 상징되고 있다.
서양에서 보라색을 불길한 색깔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우아하고 로맨틱한 분위기 연출고대 황실에서부터 사용된 보라색은 화려하고 신성하며 전통적이며 권위적인 이미지를 준다.
마찬가지로 현대의 보라색은 색의 이미지 분류에서 환상적이고 우아하고 매력적이며 호화로운 색상으로 분류돼 있다.
여기에 부드럽고 여성스러우며 로맨틱한 색으로도
구분된다.
예로부터 보라색은 서민들에게는 금지된 색이었다.
보라색이 값비싼 분위기를 풍기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또 보라색은 파랑이나 빨강처럼 성별이 없다.
음양을 모두 지닌 색으로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어울리는 색. 여성은 남성의 멋을 남성은 여성의 미를 찾는 데 이만한 색은 없다.
보라색은 가을과 겨울에 엘레강스한 느낌의 여성복에 가장 많이 사용된다.
그러나 여성은 남성의 멋을 추구하고 남성은 여성의 미를 돌아보는 패션의 경향으로, 여성과 남성의 이중적인 분위기를 내는 보라색이 전성기를 맡고 있다.
보라색은 파랑과 빨강의 비율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변한다.
푸른빛의 보라색에서부터, 붉은 기운이 도는 자주, 짙은 붉은 빛의 와인에 이르기까지 보라색과 자주색 계열은 다양성이 매력이다.
특히 실크 소재에서 보라색은 빛을 내는데, 이밖에도 벨벳ㆍ코듀로이ㆍ모직류도 고급스러운 느낌을 더한다.
원피스나 블라우스, 니트와 같은 기본적인 패션 아이템은 물론 구두와 스카프, 핸드백 같은 소품에도 다채롭게 적용되면서 고급스럽고 깊이 있는 매력을 준다.
시선을 매혹하는 보라색은 성적인 에너지도 포함하고 있다.
보라색은 어떻게 배색되느냐에 따라서 캐주얼한 느낌부터 섹시한 분위기까지 자유로운 변신이 가능하다.
남보라, 빨강, 자주 등과 함께 비슷한 분위기로 연출하거나 회색과 어울리면 매력적이면서도 차분하게 꾸밀 수 있다.
감각적으로 보이려면 녹색과의 만남을 시도한다.
카키, 올리브 그린 등 차분하게 가라앉은 녹색과 함께하면 보색 대비의 촌스러움을 세련되게 바꿀 수 있다.
- 자가치유의 생명력이 깃든 색보라색은 물질적인 색이었고, 또 정신적인 색이었다.
신의 색이었고, 황제의 색이었다.
동시에 광인들의 색이며, 예술가의 색이었다.
서양의 색체 연구가는 보라색을 ‘침체된 우울한 기분이나 체험을 가진 불행한 아이’라고 했고 또 다른 학자는 ‘정서 불안을 가져오는 몸의 기능 저하를 나타낸다’고 했다.
색채 심리 연구가들의 입을 빌리자면 보라색은 ‘몸의 병’과 ‘정신의 불행’을 말한다.
그러나 일본의 색채치료 전문가 스에나가 타미오는 자신의 저서 ‘색채 심리’에서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위기 상황에서 사람들은 보라색에 마음을 빼앗기는데, 침울한 파랑에서 생기를 얻는 빨강으로의 전도되는 과정에서 생명력의 균형을 회복하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보라색의 매력에 빠져드는 까닭은 갈등을 치유하고 융화하고자 하는 자가 치유의 생명력이 작용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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