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빼앗긴 황제의 죽음 | |
[오마이뉴스 2006-02-14 14:35] | |
[오마이뉴스 한성희 기자] |
홍릉(洪陵)은 명성황후(1851-1895)의 능호이지 고종의 능호가 아니다. 1895년 8월 20일 명성황후는 일제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토 히로부미와 전임공사 미우라 등 일제가 계획한 왕비 시해 사건에 시신조차 불에 태워진 채 유해도 없던 명성황후는 2년간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 저런 얼굴을 가진 조선의 문인석을 본 일 있는가? 4m 정도 될 듯한 왜색이 짙은 문인석의 얼굴은 홍릉 석물을 일본인이 제작했다는 설을 뒷받침해준다. |
ⓒ2006 한성희 |
서인으로 폐한 지 불과 하루 만에 다시 빈호(嬪號)를 특별히 내렸다가 10월 10일 왕후로 복위시킨 뒤 10월 15일에서야 명성왕후가 승하했음을 발표했다. 유해조차 없는 왕비 국상이 죽은 지 2개월이나 지난 뒤에 겨우 반포되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왕후가 입던 옷을 유해 삼아 겹이불과 겹옷을 입히는 소렴과 대렴이 끝난 뒤, 주인 없는 빈 관만으로 동구릉 숭릉(현종의 능) 옆에 묻었다. 이때 고종은 숙릉(肅陵)이란 능호를 내렸고 이곳이 지난해 발견된 명성왕후 첫 능인 숙릉 조성지이다.
▲ 홍릉 능침의 병풍석은 인조의 장릉과 융릉 양식을 취했지만 석물의 수준은 훨씬 떨어진다. 왕릉 석물 상설을 그 시대 왕이 가진 권력과 비례해보면 해답이 나온다. |
ⓒ2006 한성희 |
망국의 황제는 능호도 없다
고종의 장례는 이왕직에서 주도했고 황제의 국장비용으로 쓰라고 정한 돈이 10만원(약 13억원)이었다. 조선 초기 국장에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갔던 것까지 거론하지 않아도, 조선 후기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천장 하는데 썼던 비용이 200억원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형편없이 초라한 국장이었다.
당시 내각은 이완용, 조영희 등 친일매국 인사들로 채워져 있었고 이왕직에서 왕실 재산과 업무를 관장하고 있었다. 대한제국황실업무를 전담하던 궁내부는, 일제가 대한제국 황실을 감시하기 위해 만든 이왕직(李王職)으로 업무가 이관된다. 이 홍릉은 식민풍수들과 친일로 변절한 조영희가 정한 자리였다.
▲ 조선 전통 귀면 문양과는 거리가 먼 북석 도깨비상. 이렇게 토종 도깨비답지 않고 입술인지 이빨인지 구분 못할 이상한 귀면은 처음 본다. |
ⓒ2006 한성희 |
이때부터 황실을 격하하려 사용된 식민용어 이씨조선(李朝)이라는 말이 아직도 남아있으니 식민문화의 잔재는 이렇게 뿌리뽑기 어려운 것인가. 이러한 일제가 고종의 능호를 허락할 리가 없었다. 고종이 능호를 쓴다는 것은 대한제국 황제의 신분을 인정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나라를 빼앗겼어도 백성들에게 고종의 영향력은 막강했고 조선인들에겐 정신적인 지주였으며 여전히 황제였다. 고종의 국장일을 계기로 3·1운동이 일어난 것과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국장일을 맞이하여 6·10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은 이와 같은 맥락이다.
▲ 일자각(침전) 안에 있는 침상이 놓여있다. |
ⓒ2006 한성희 |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구실을 댄 홍릉 천장은 고종의 산역과 똑같이 시작됐고 2월 12일 오전 6시에 현궁을 열었다. 2월 16일 오후 4시 명성황후는 금곡으로 이장됐다. 3월 3일 발인한 고종의 장례행렬은 금곡으로 도착했고 먼저 와 있던 명성황후와 고종은 3월 4일 합장된다.
명성황후와 합장했으니 홍릉이라는 능호를 쓰는 것을 일제로서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고종은 명성황후와 21년 만에 지하에서 함께 잠들었다. 나라를 빼앗긴 망국의 황제가 능호를 지니는 하는 방법은 이밖에 없었다.
출처 : 시신이 없는 명성황후릉 | 왕실의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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