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온 뒤 갠 맑은 하늘 위를 수놓는 무지개를 보면서 저 무지개의 시작점은 과연 어디일까 잠시나마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어쩌다가 밤하늘에서 별똥별이 떨어지는 광경을 목격할 때면 저 별이 떨어진 곳에는 과연 어떤 일이 생길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늘 비슷비슷한 일상 속에서 이런 말도 안되는 생각의 꼬투리를 한번 물고 늘어지기 시작하면 어느덧 끝도 없이 이어지기도 한다. 무슨 공상가도 아니고 왜 이런 생각들을 때때로 하냐는 얘기가 나올 수 있겠지만, 이런 생각들은 결코 무시할 것이 못된다. 우리가 칭송해 마지 않는 수많은 판타지 문학도 이런 일상 속에서의 얼토당토않은 생각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설정만 본다면 당최 말이 안될 것 같은데 그걸로 한 편의 기나긴 이야기를 지어나가면 어느덧 현실적으로 딱딱 맞아들어가는 아귀에 절로 몰입하게 되는 것이 "비현실적인" 판타지 문학이 주는 "현실적" 재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뭔가 말초적으로 자극적인 무언가가 펼쳐지지 않아도 머리와 마음이 만들어 내는 세계 속에서 헤엄치는 것만으로도 황홀해지는 쾌감. 또 하나의 판타지 영화 <스타더스트>는 이러한 판타지 문학의 미덕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영화다. 말도 안되는 설정에서 출발해 멋들어진 모험담으로 완성하는 실력과, 굳이 스펙터클한 스케일을 자랑하지 않더라도 필충만한 상상력과 이야기로 얼마든지 쫄깃한 재미를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때는 19세기 장소는 영국. 영국의 어느 가장자리 마을 경계에는 담이 있었는데, 오랫동안 출입이 금지되었던 그 담은 사실 현실세계와 마법세계를 나누는 담이었다. 그런데 이 담을 용감히 넘은 청년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트리스탄(찰리 콕스). 마을 최고의 인기녀 빅토리아(시에나 밀러)를 짝사랑하는 트리스탄은 빅토리아의 마음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되던 중, 그녀와 달콤한 데이트를 하다가 별안간 별똥별이 뚝 떨어지는 것을 발견한다. 트리스탄은 용감하게도 빅토리아가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겠다는 조건 하에 저 떨어진 별을 일 주일 뒤인 빅토리아의 생일 전까지 가져오기로 약속한다. 제대로 콩깍지가 씌인 트리스탄은 그 길로 담을 넘어 별을 찾아 나서고, 결국 그는 돌조각이 아닌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별 이베인(클레어 데인즈)을 만난다. 그러나 그 별을 노리는 사람은 그뿐만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얘기가 꼬이기 시작한다. 400년 전 떨어진 별을 이용해 수백년 간 젊음을 유지해 온 마녀 라미아(미쉘 파이퍼)와 그녀의 자매들이 또 한번 젊음을 되찾기 위해 그 별을 찾는 데 혈안이 되고, 거기에 그 별을 찾으면 왕위를 차지할 수 있다는 이유로 담 너머 스톰홀드 왕국의 왕자들까지 나선다. 이렇게 단순히 사랑에 대한 열망에서 시작한 한 청년의 여정은 어느덧 현실세계와 마법세계를 넘나드는 거대한 모험으로 바뀌는데.
여전히 상당수의 성인 관객들은 판타지 영화를 아이들용 영화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어느덧 판타지 영화가 굵직굵직한 배우들의 연기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된 것도 사실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부터가 편을 거듭해 가면서 어느새 연기 좀 한다는 영국 출신 배우들이 총집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하지 않는가. 판타지 문학의 특성상 셀 수 없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만큼 캐스팅만은 절대 소홀히 할 수 없으리라. <스타더스트> 역시 남부럽지 않은 화려한 배우진을 자랑한다. 주인공 트리스탄 역을 맡은 신예 찰리 콕스를 필두로, 별 이베인 역의 클레어 데인즈, 마녀 라미아 역의 미쉘 파이퍼, 셰익스피어 선장 역의 로버트 드 니로, 트리스탄이 흠모하는 여인 빅토리아 역의 시에나 밀러 등 신구 세대를 초월하는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한다. 이들 뿐 아니라 단 몇 분 등장함에도 영화에 믿음직한 중량감을 한껏 실어주는 스톰홀드의 왕 역의 피터 오툴, 비운의 왕자 역의 루퍼트 에버릿, 거기에 이야기를 감미롭게 들려주는 나레이터 역으로 이안 맥켈런, 백색의 마법사 간달프 님의 출장 방문까지, 알찬 속을 자랑하는 캐스팅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화려한 진용을 자랑하는 배우들은 쫄깃한 이야기 전개와 감칠맛 나는 상상력에 힘입어 역시나 멋진 연기를 보여준다. 우리에겐 생소한 배우인 트리스탄 역의 찰리 콕스는 여성팬들깨나 양성할 착실한 비주얼을 자랑하며 숫기없는 청년과 듬직한 남자 두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이베인 역의 클레어 데인즈는 10년 넘게 세월은 흘렀지만 <로미오와 줄리엣> 이후로 오랜만에 눈을 확 사로잡는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이베인의 신비로움을 잘 표현했다. 중견 배우들의 연기는 더욱 눈부시다. 정말 오랜만에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낸 미쉘 파이퍼는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변함없는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동시에 순식간에 추해지는 마녀의 모습 또한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매혹적이면서도 한편으론 주책스런, 분명 표독스러운데 마냥 미워할 수는 없을 듯한 개성 있는 마녀의 캐릭터를 멋지게 소화했다. 여기에 명배우 로버트 드 니로의 망가짐은 화룡점정이다. 그가 연기하는 셰익스피어 선장은 하늘을 배로 항해하며 번개를 수집해 거래하는 일종의 해적으로 트리스탄과 이베인이 모험을 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신비로운 인물인데, 사실 그에게는 누구에게도 말 못할 충격적인 비밀이 있다. 그런데 이 비밀을 절대 매치가 되리라고 생각할 수가 없는 로버트 드 니로가 너무나 능청스럽게 연기해내면서 영화 속에서 가장 큰 웃음을 이끌어낸다. 시종일관 유쾌하고 아름다운 판타지 속에 더해지는 이 명배우의 망가짐은 더욱 감칠맛을 더하는 명품 양념이다.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망가짐도 그가 해내니 이리도 거룩하다.
이렇게 배우들의 연기 면에서는 누구 하나 나무랄 데 없이 알차지만, 한편으로 흔히 판타지 영화에 기대하듯 스크린을 압도하는 거대한 스케일을 기대했다면 다소 실망하실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야기가 진행되는 영화 속 배경은 충분히 광활하지만 대규모 전투신이나 공간감각을 상실케 할 만큼 압도적인 물체가 등장하진 않는다는 얘기다.(그러나 셰익스피어 선장이 운행하는 번개를 모으는 배가 하늘을 유영하는 모습은 참 아름답다.) 대신에 영화는 누구라도 무릎을 칠 만한 기가 막힌 상상력으로 꽉 찬 재미를 준다. 물론 판타지 장르에 있어서 상상력이 빠지면 뭐가 남겠냐마는, <스타더스트>는 특히나 이야기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각종 마법과 자연현상이 일으키는 유쾌한 상상력으로 빼곡하다. 하늘에서 떨어진 별이 사실은 돌조각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설정은 예상치 못한 여러 상황들을 발생시키며 긴장감을 안겨준다. 아름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별을 노리는 마녀 라미아가 펼치는 각종 마법은 처음엔 어떤 강력한 저주처럼 섬뜩하게 느껴지다가도 그 효력이 발휘되는 순간 벌어지는 독특한 효과들로 인해 예측불허의 재미를 준다. 이외에도 담 하나를 두고 나란히 존재하는 현실세계와 마법세계의 묘한 대비, 앞서 얘기했듯 번개를 직접 수집해 상거래에 이용하는 해적들, 죽을 당시의 모습 그대로로 남아 현세를 떠도는 유령들 등 거대한 스케일이 따로 필요없는 흥미로운 상상력으로 영화는 두 시간 여의 러닝타임을 성실하게 채웠다.
이야기 전개는 또 어떤가. 하늘에서 떨어진 별을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청년이 찾아나선다는 정말 동화같은 설정에서 출발한 영화는 여기에 마녀 라미아, 왕위를 탐내는 왕자들까지 끼어들면서 생각보다 장난이 아닌 모험담으로 발전한다. 결국 이들 사이에서 예상치 못한 충돌이 수시로 벌어지고 이를 통해 영화는 유치할 수 있었던 이야기 구조를 단순하지 않게 다양한 줄기로 뻗어나가게 한다. 별 한 명(?)을 놓고 다양한 캐릭터들이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대끼며 빚는 다양한 갈등 양상은 쉴새 없는 사건의 촉발로 관객의 몰입을 도울 뿐 아니라 갈등의 절개와 봉합 모두 깔끔해서 관객으로 하여금 이야기가 복잡하다는 생각도 쉽게 들지 않게 한다.
규모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는 필충만한 상상력, 복합적이되 복잡하지 않은 이야기 전개와 함께 이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이라면 시종일관 영화를 수놓는 유쾌발랄함이다. 일반적으로 판타지 영화는 오락영화이면서도 그 세계관이 워낙에 광활한 만큼 그 중심에 무언가 섣불리 다뤄서는 안될 진지한 무게감을 얹어놓는다. 그러나 <스타더스트>는 어떻게 보면 관객들이 부담스러워 할 수도 있을 그런 무게감을 걷어내고 관객들이 더욱 들뜬 마음으로 환상의 세계로의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그 빈자리를 경쾌하고 발랄한 분위기로 채웠다. 실제로 이 영화의 이야기에서 만약 어떤 발랄함이나 낭만을 모두 걷어낸다면 꽤나 심각한 얘기가 충분히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애초에 그런 길을 거부한다. 사실 이 영화 속에서 목숨을 잃는 사람들도 꽤 있음에도 그 순간들을 허를 찌르는 코미디로 가볍게 웃어넘기고(유령들의 모습에서부터 이 대책없는 유머감각이 드러난다), 뭔가 로맨틱하거나 안타까울 것만 같은 장면들에 예상치 못한 유머를 삽입함으로써 불필요한 무게감을 가뿐히 전복시키는 쾌감을 가져오기도 한다. 이렇게 수시로 등장하는 유머들은 탄탄한 이야기구조와 배우들의 튼실한 연기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결코 경박하지 않고 순수한 경쾌발랄함으로 다가온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함께 하는 주인공들의 사랑과 모험은 정말이지, 아무 부담없이 산들바람처럼 만끽할 수 있는 기분좋은 소풍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렇게 영화가 경쾌발랄하다고 마냥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가운데에는 부담없이 즐기다가 어느새 뿌듯함을 안겨주는 한 청년의 성장담도 들어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던 숫기없는 청년이 생각지도 못한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는 당당한 남자로 성장해 가는 모습이 담겨 있다. 사랑의 라이벌과 제대로 맞서지도 못하고, 자신이 사모하는 여인에게 제대로 감정표현도 못하던 그는 평소 그답지 않던 무모한 약속 하나로 인해 사랑을 위해서 누군가와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얻고, 자신도 사랑받을 가치가 충분히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간다. 이는 하늘에서 떨어진 별똥별 이베인과는 연관이 된다. 이베인은 마법세계에서는 생명력과 무한한 빛을 지닌 그야말로 "별"이지만, 우리에게 하늘의 빛나는 별이 실은 아무렇지도 않은 거대한 돌덩이이듯 그녀 역시 현실세계로 돌아오면 별 가치 없는 돌조각에 불과하게 된다. 허나 인간의 눈으로 하찮게 보이던 그 돌조각도, 결국은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 눈부신 존재가 아니던가. 인간의 눈으로는 별 거 없게 보일지라도 사실은 무한한 가치를 품고 있는 이베인과 함께 하는 여정이기에, 어쩌면 트리스탄 역시 그녀와 함께 자신 안에 감춰져 있던 커다란 가치를 깨달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이 영화는 이렇게 유쾌하고 발랄한 분위기 속에서도 한 청년이 자신의 가치를 깨달아가는 흐뭇한 성장담을 부담스럽지 않게 따뜻하게 그려넣었다.
<스타더스트>에게서 <반지의 제왕>에서 볼 법한 묵직한 주제 의식같은 것은 어쩌면 찾기 힘들지도 모른다. 시각을 압도하는 막대한 볼거리 같은 것도 기대에 미치진 못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타더스트>는 이런 일종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판타지 장르 본연이 지닌, 단지 꿈 속을 거니는 듯한 상상력 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워질 수 있는 막대한 재미로 그 약점들을 모조리 상쇄시켜 버린다. 거침없이 가벼운 붓놀림처럼 하늘을 수놓으며 빛나는 별똥별마냥, <스타더스트>는 별사탕처럼 톡톡 씹히는 재미로 상상력의 갈증을 유쾌하게 풀어줄 후회없는 나들이다. 어렸을 적부터 품어왔던 상상력을 순수하게 충족시켜주는, 판타지 본연의 재미를 그대로 품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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